‘슬기엄마’가 돌아왔다. 사회학도 출신의 아줌마 의사 이수현은, 지난 2004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본지에 ‘슬기엄마의 인턴일기’를, 지난 2005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슬기엄마의 주치의일기’를 각각 연재했었다. 4년간 계속됐던 연재를 중단한 지 1년 6개월 만에 슬기엄마가 다시 펜을 잡았다. ‘슬기엄마의 일기’ 시즌 3가 시작되는 셈이다. 지금은 내과 전문의이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가 된 그가 다시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첫 번째 글에 드러나 있다. <편집자 주>

“사정상 그 약을 쓸 형편이 못 됩니다….”
HER2 유전자가 과다발현되는 유방암 환자에서 허셉틴(Herceptin)이라는 약은 유방암 환자의 예후를 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도 효과적인 약제이기 때문에 HER2 유전자 과다발현 환자에서 이 약을 처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양학과 의사 사이에서는 중죄(!)에 해당한다. 표적치료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허셉틴이라는 약은 1998년 미국 FDA에서 승인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부터 재발성, 전이성 유방암 환자에게 보험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허셉틴 단독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탁센(Taxane) 계열의 항암제와 병행해서 사용하게 되는데, 고가의 허셉틴에 대해 보험 적용을 해주다보니 탁센은 보험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허셉틴을 비보험으로 투약할 경우 한 달 환자들의 비용부담이 130~180만원 정도 되는데, 보험이 되면 이중 5%(얼마 전까지는 10%)만을 지불하는 셈이니, 얼마나 저렴한가! 하지만 탁센 계열의 약물 중 가장 싼 약제를 선택할 경우 대략 40~50만원 정도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니 이 약제를 포함한 병용요법으로 치료를 받게 되면 한 달에 항암제 가격만 50~60만원 정도가 든다. 허셉틴이 보험이 안 되던 시절에는 140~150만원 정도 들었을 터이니,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허셉틴이 보험적용이 되기 전에도 이미 종양내과 의사들은 대규모 연구결과를 통해 이 약이 생존률 향상에 큰 도움을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보험적용이 안 되던 시절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이 약을 투여할 것을 권유했을 것이다. HER2 유전자 과다발현 유방암의 특징은 나이가 젊은 여성에서 빠른 속도로 재발하고, 재발 후 급격하게 악화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주로 뇌로 전이되어 생존률을 떨어뜨리고 죽기 전 삶의 질이 순식간에 망가지게 된다. 전이성 유방암이 아니라도 완치를 목적으로 한 수술을 받은 환자 중 HER2 유전자가 과다발현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예방적으로 허셉틴을 썼을 때 이후 재발율을 두 배 이상 낮춘다는 보고가 2005년에 이미 나왔지만, 우리나라는 2009년 7월에 임프절 양성의 조건을 가진 환자로 제한하여 보험으로 사용을 승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정 약제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시기와 그렇지 않던 시기를 나누어 생존률의 차이가 있음을 보고하는 메타연구들이 있는데, 아마 우리나라는 보험으로 인정해주던 시기와 보험이 적용되지 않던 시기를 나누어 분석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생명 가치의 무한함 vs. 경제적 자원의 유한함
앞으로 항암제는 정상세포를 포함한 모든 세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세포 독성 약제(cytotoxic drug)보다는 특정 신호전달체계 상에서 암세포에서만 발현되는 단백질이나 신호를 감지하여 암세포만 공격할 수 있는 약제가 주로 개발될 것이다. 치료 효과를 드라마틱하게 향상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약제들도 꽤 있다. 정상 세포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항암제 독성도 상대적으로 낮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환자들의 삶의 질도 잘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약은 거의 대부분 보험이 안 되기 때문에 한 달에 수백만원을 개인돈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의 비용부담을 짊어질 수 있는 서민들은 많지 않다.
이십년 이상 암환자 치료에 종사하고 계신 모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상 ‘전이성 대장암 치료에서 표준치료에 혈관생성 억제제를 추가하는 것이 독성은 무시할 만한 것에 비해 생존률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치료 효과가 좋다’는 설명을 100명의 환자에게 하면 5명 남짓이 신약을 쓸 수 있다고 하신다. 여러 국제적인 치료 가이드라인에서 이 신약을 더하는 것을 대장암의 표준치료로 제시하고 있으나 우리나라 보험에서 급여가 제한되고 있으니 뻔히 좋은 약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못하는 환자가 훨씬 많아, 효과적이고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된다 해도 이를 환자에게 설명하는 것은 의사에게도 설명을 듣는 환자에게도 고통이 되는 현실이다.
다국적 기업에서 개발한 신약들의 효능이 입증되고 좋은 약제가 많이 나올수록 (또 그만큼 비싼 약들이 개발될수록) 우리는 계속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 이제 특정 약제를 보험으로 쓰게 해달라는 주장을 하기에는 ‘좋은’ ‘신약’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암환자의 진료비용 본인부담을 20%에서 10%로, 10%에서 5%로 낮추면 중산층 암환자들이 비급여 신약을 치료제로 결정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인가? 모든 신약을 다 보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우선순위는 누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환자에게 어떤 약을 쓸 것인가는 지극히 의학적 질문이지만, 그 대답을 얻는 과정에는 사회적 합의(consensus)가 필요한 것이다.
그동안 할 말 많았다
종양내과는 다른 내과의사들에 비해, 예를 들면 내시경, 초음파, 혈관촬영술 등 활발한 술기를 병행하며 진료하는 내과의사들에 비해 육체적 활동성이 낮은 경향을 보인다. 주로 책상 앞에 앉아 일하고 환자 차트를 뒤적이며 논문을 준비하고, 어떤 약을 쓸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시간이 일과의 대부분일 것이다. 다른 과와 집담회를 하거나 학회에 가거나 하는 활동들도 거의 책상과 의자 앞에서 이루어지니 특별히 기분을 전환할 아이템이 없다. 그런데 머릿속에 쌓여 있던 고민과 불만, 그리고 분노가 조심스럽게 표출된 곳이 있었으니, 11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제1회 항암정책포럼 : 항암제 보장성 강화의 방향’이라는 이름의 세미나였다. 세상물정 모르고 열심히 환자보고, 열심히 연구활동하는 데 여념이 없으신 줄만 알았던 종양학과 대 선배 의사선생님들이 많이 참석하셨다. 부족한 현실이지만 ‘내 앞에 있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리에 오셨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 일은 최선을 다하려는 순수한 마음만으로 변화되지 않으며 치밀한 계산과 사회적 주장, 그리고 정치적 세력화를 동반했을 때 변화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야속하다. 좋은 약이 있으니 더욱 많은 환자들에게 그 혜택을 주고, 내가 치료하는 환자가 잘 나을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경로를 거쳐야 할 것이다. 전체 인구대비 해당 질환 환자의 비율, 질병의 중등도를 고려하여 재원의 cost to benefit ratio를 따져봐야 한다. 정책결정권자들과 끊임없이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사회적 발언이 일상화될 수 있는 루트도 준비되는 것이 좋겠다.
특별한 사회적 압력이나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 의료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는 중요한 자리가 ‘자생적으로’ 마련되었다고 믿고 싶다. 정작 국민은 그 자리에 없었고, 여전히 정책결정권을 가진 쪽에서는 일방적인 주장을 반복하고 의사가 돈 문제를 거론하면 논의와 상관없이 제약회사 리베이트에 대한 책임을 운운하며 논의의 핵심을 비껴가는 후진적인 토론 문화가 극복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이번 원고의 많은 표현은 ‘항암제 보장성 강화의 방향’ 포럼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개진하신 의견을 인용하고 재구성한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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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부족하기만한 보험재정이 정작 필요한 곳에 사용되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입니다..
2009/12/07 11:42효과가 증명되지도 않은, 치료받으나 마나 삶의 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한방' 에 엄청난 금액이 투입되지를 않나..
감기같이 경한 질환에도 보장성을 강화하여 정작 암환자들에게는 보장성이 약화되는 현실..
과연.. 해결될 수 있기는 할까요..
해결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군가 총대를 매고 적정부담, 적정급여를 외쳐야 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의술은 인술이고, 인술은 공짜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는 돌 맞겠지요. 그런데, 본인이 부담을 해서 보험이 안되는 더 좋은 약제를 쓰는 것 조차 법으로 묶어 버리는 것은 너무 사회주의적 아닌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의료접근성에 차이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데 말입니다. 내가 좋은약 못쓰니까 너도 쓰지마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요?
2009/12/08 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