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인쇄하기]
4년 전에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은 64세 할머니. 지난 4년간 3번의 골절로 정형외과 수술을 받으셨다.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병의 특성상 제대로 된 면역 글로불린이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잦은 폐렴과 기타 감염으로 1년에도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병이 조절되었다가 안 되었다가 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여러 항암제들을 바꿔가며 투여해 왔고, 최근 들어 전체적으로 병이 악화되는 코스로 진행되는 것 같다.
글쓴이 이수현은, 이화여대에서 자연과학의 기본인 물리학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의 기본인 사회학을 공부했다. 의료사회학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으나, 응용과학의 첨단인 의학을 ‘직접’ 공부하고 싶어서 연세의대에 편입하여 4년만에 ‘쾌속’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내과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다. 여전히 남편은 물론 딸 슬기에게도 별로 신경을 못 쓰는, 친정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고는 생활이 안 되는 30대 아줌마다.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배운 사회학과 의학을 접목해 보리라는 의지를 잃지 않고 있다.
‘슬기엄마’가 돌아왔다. 사회학도 출신의 아줌마 의사 이수현은, 지난 2004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본지에 ‘슬기엄마의 인턴일기’를, 지난 2005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슬기엄마의 주치의일기’를 각각 연재했었다. 4년간 계속됐던 연재를 중단한 지 1년 6개월 만에 슬기엄마가 다시 펜을 잡았다. ‘슬기엄마의 일기’ 시즌 3가 시작되는 셈이다. 지금은 내과 전문의이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가 된 그가 다시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첫 번째 글에 드러나 있다. <편집자 주>

최근 다발성 골수종에 효과적인 좋은 약들이 많이 개발되었지만 그 중 일부만이 국내에서 사용가능하고 그나마 약값이 너무 비싸서 웬만한 사람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다른 약제에 반응하지 않는 불응성 다발성 골수종에 사용할 수 있는 레날리도마이드라는 약은 하루 한 알 먹는데, 한 알에 50만원이 넘는다. 한 달에 이 약값만 천5백만원이 넘는 셈이다. 할머니는 한 달 전부터 이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째에 소변검사를 했더니 M 단백 수치가 거의 정상으로 떨어지고 신장수치나 빈혈 등의 임상적 지표들이 놀랍도록 좋아졌다.
이번에 응급실로 오신 이유는 구역감이 심하고 배가 아파서였다. 여러 평가를 통해 내린 진단은 이른바 ‘똥배’였다. 복부 엑스레이에서 배에 똥이 가득 차 있다. 금식하고 수액 맞으면서 두세 번 관장하여 변을 보게 했더니 증상이 많이 좋아지셨다(사실 레날리도마이드 자체 때문에도 배가 아플 수 있고 그래서 약을 끊으며 증상이 완화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척추에 병변이 있어서, 그로 인한 방사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내심 만족할만한 성과(진단과 치료 면에서!)를 거두었다고 판단, 퇴원 준비를 하는데, 정작 할머니는 불만투성이다. 별로 좋아진 것도 없고, 사방 군데 몸이 아프다며….
다소 지친 얼굴로 간병중인 아들, 며느리와 얘기를 나눠보니, 4년 전 처음으로 이 병을 진단받았을 때, 할머니에게 병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리지 않고, 심각하지 않은 병이니 치료하면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한 게 전부라고 한다. 시시콜콜 병원 출입이 잦아지고 사지 골절로 인해 거동도 불편하고, 심각한 병은 아니라면서 자식들은 자꾸 항암제 치료를 받으라고 하고, 뼈에 병이 있으니 병이 있는 부위에 통증이 심하고, 자꾸 감기 걸리고, 치료약제로 고용량 스테로이드가 들어가다 보니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지 않는 기간에는 호르몬 부족으로 인해 더 힘도 없고 의욕도 없고…, 이렇게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 수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할머니는 불평불만 투성이에 항상 짜증을 내고, 조금만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해도 눈물지으며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괴팍한 노인네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에게 우울증이 있어 보인다. 지금이라도 병에 대해 자세히 설명 드리고 치료에 협조적인 자세를 갖도록 하자는 나의 제안은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다. 자식들은 보험도 안 되는 비싼 약값을 부담하느라 경제적으로도 힘들고, 짜증만 내는 환자를 돌보는 것에도 지쳐 보인다. 객관적인 검사수치가 좋아져도 환자의 짜증과 우울함은 쉽게 걷어내지지 않는다.
괴팍한 노인네가 되어 버린
12년 전에 폐암을 진단받고 수술하신 79세 할아버지. 이번에 진단된 위암은 수술할 수 있는 시기를 넘겨 발견되었다. 두 번째 진단받은 암으로 내심 충격을 받으셨는지, 내가 할아버지를 처음 뵈었을 땐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불편한 데를 얘기해보라 해도 별 말이 없는 채, 식사도 안 하시고 일체 거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계시기만 했다.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향해,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왜 자꾸 활동하시라고 하는지, 가능한 먹을 수 있으면 먹는 게 왜 중요한지, 완치되지는 않지만 항암치료를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인지, 항암치료를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경로의 차이가 예상되는지 등등에 대해 말씀드렸다. 이미 연세가 많으신데 무리하게 항암치료를 하려는 게 아니고, 당장 문제가 되는 증상을 다스려서 가능한 일상생활을 유지하실 수 있게 도와드리는 치료를 하려는 거라는 말씀에 비로소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신다.
우리는 첫날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 이 할아버지는 성격이 상당히 깐깐하신 분으로, 당신 생각에 일처리 방식에 문제가 있을 땐 일일이 지적하고 건의하시는 스타일인데다가 기억력도 엄청 좋아서 내가 한 설명, 담당 간호사 이름, 투약상황을 다 알고 계셨다. 병의 진행속도와 전신상태 등의 변화를 경과관찰 하는 동안, 결국 항암제는 쓰지 못했고, 할아버지 컨디션은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위장관 폐색으로 음식을 드시지 못하게 되었고 스텐트를 넣으려고 내시경을 했다가 급성폐부전증이 발생해 중환자실도 다녀오셨다.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본인은 물론 자식들, 그리고 의료진들도 더 이상의 무리한 치료가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다. 하루하루 몸이 야위어가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상태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회진을 가도 특별히 병세나 상황 변화에 대해 내가 할 말도 없고, 본인도 웬만한 건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 그래서 난 회진을 가면 환자에게 하루 종일 누워 있지 말고 한두 번은 휠체어를 타시라는 것, 아무리 환자지만 이틀에 한 번은 면도를 하시라는 것 등의 소소한 것들을 주문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환자에게 하루 종일 뭐 했는지 말씀해보시라고 주문한다.
환자는 L-튜브를 꽂았더니 목이 아프다, 누워 있으니 오늘은 어깨가 아프다 등의 소소한 변화도 말하지만, 주로는 당신 생각의 흐름을 보고한다. 어제는 자식들보고 영정으로 쓸 사진 후보를 10개 골라오라고 해서 그 중에 2개를 결정했고, 장례식장에 걸 사진 액자를 맞추었다는 둥, 골프장 회원권이 있는데 그건 큰 아들 안 주고 마누라 줄 거라서 내일 부인 명의로 바꾸려고 한다는 둥, 공증으로 처리할 명의변경이 몇 건 있어서 변호사를 불렀다는 둥,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하루 종일 생각이 많은데 생각나는 걸 써보려고 했더니 기운이 없어서 글씨를 못 쓸 상황이라 오늘은 녹음기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는 둥, 말씀이 많으시다. 하루 종일 누워 있으면서 당신의 죽음과 장례를 비롯한 ‘그 이후’를 준비하고 계신 셈이다.
자기가 이렇게 시간을 갖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사실 의사로서 뭘 해준다기보다는 그냥 경과관찰하는 게 전부인지라 고맙다는 말이 송구스럽다. 사실 3차 의료기관의 형편을 생각하면 임종을 준비할 수 있는 호스피스 요양기관으로 전원을 해야 하는데, 며칠 전 부정맥이 일시적으로 악화되며 호흡곤란이 오고 가래를 잘 뱉지 못하면서 폐렴이 악화되는 상황이라 다른 곳으로 보내기에는 환자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다. 소위 전원의 시기를 놓친 셈이다.
준비할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
낫지 않는 병, 심각한 병이 진단되면, "우리 부모님 성격에 곧이곧대로 병명을 알려드리면 치료받지 않고 그냥 퇴원하신다고 할 거에요", "환자가 마음이 약하니 진단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마시고 그냥 약하게 표현해 주세요" 등의 요청을 하는 자식들이 있다. 물론 그 심정은 100%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환자가 자신의 질병 상태와 경과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치료기간이 연장됨에 따라 쉽게 낫지 않는 병이 원망스럽고 몸도 개운치 않으니 의욕도 점점 떨어진다. 자신에게 경제력이 없는 경우에는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커진다. 정황적으로 우울증이 올 가능성도 높아지는데, 이렇게 되면 몸도 몸이지만 여러 사람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요즘은 많은 병들이 완치되지는 않으나 조절할 수는 있고, 그러다보니 병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하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다행일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은 여러 사람 진을 다 빼놓기 십상이다.
CT상으로는 수술 가능한 병변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배를 열어보니 암이 복막내로 다 퍼져서 배를 열었다 닫고 나오는(Open and Close) 수술을 한 경우 보호자들의 대부분이 “수술은 잘 되었으나 아직 병이 좀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항암치료를 하는 거”라고 설명해주기를 요청한다. 수술을 하고 났는데도 배가 더부룩한 환자들, 항암치료를 몇 차례 했는데 오히려 더 힘들고 배도 거북하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 행해지는 치료가 완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환자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매우 크다. 자신을 속이고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채 치료를 시작했다는 것 때문에, 의사에 대해, 그리고 가족에 대해 분노한다. 환자에게 진실이 알려지지 않은 치료기간 동안에 의사들이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실을 먼저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 기간 동안 진정한 의사환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를 위하여 잠시 기도를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 원칙과 정도가 있겠는가! 말기 환자에게 죽음을 직접적으로 고지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질병의 심각도가 중증이고 현대 의학에서 더 이상 적극적인 검사와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이 의사와 병원에 의존하며 자기 생활 전부를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정작 환자에게는 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정보를 서로 숨기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것이 환자와 가족 사이에, 그리고 의료진과도 덜 고통스럽고 후회 없는 시간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뭘 드시는 게 힘들면 사탕 같은 거라도 입안에 넣고 단물을 삼켜보시라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버터맛 캐러멜을 시도해 봤는데 입안에 달라붙어서 못 먹겠다고 나에게 몇 개 집어주신다. 말기 환자에 대한 진료와 회진이 고통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이 할아버지처럼 본인이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맑은 정신으로 죽음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말씀을 나눌 수 있을 때는 오히려 의사인 내가 환자로부터 뭔가를 배우는 시간이 된다. 그가 더 이상의 통증 없이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실 수 있도록 잠시 기도드리는 것이 지금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 것 같다. 오늘 회진은 병원 내 성당에서 기도로 마무리해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