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엄마] Compassion fatigue

오피니언/칼럼 2010/02/01 08:12 Posted by 청년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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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엄마’가 돌아왔다. 사회학도 출신의 아줌마 의사 이수현은, 지난 2004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본지에 ‘슬기엄마의 인턴일기’를, 지난 2005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슬기엄마의 주치의일기’를 각각 연재했었다. 4년간 계속됐던 연재를 중단한 지 1년 6개월 만에 슬기엄마가 다시 펜을 잡았다. ‘슬기엄마의 일기’ 시즌 3가 시작되는 셈이다. 지금은 내과 전문의이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가 된 그가 다시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첫 번째 글에 드러나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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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제 누가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줘도 뭔가 어색하고, 나이 먹는 게 새삼 느껴져서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해 한 해 반복되는 생일이 무섭기조차 하다. 무서운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두려운 게 점점 많아진다는 것, 의욕이 없어지고 뭘 봐도 무덤덤해진다는 것 때문이다. 내가 아직 이럴 때가 아닌데, 내가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자꾸 무덤덤해진다. 나라고 별 수 있겠어? 누가 뭘 잘 못하는 걸 봐도, 나도 그럴 수 있지 뭐…… 그런 흐리멍덩한 생각만 든다. 이런 정신적 노쇠함이 나를 늙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레지던트 1년차 첫날 아침 pre rounding을 돌며 긴장했던 바로 그 순간이 아직 생생한데, 역설적으로 지금의 나는 환자를 보는 것도 무덤덤하고 의욕도 없어지는 것 같다. 나의 지난날을 무조건 반성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근간의 나를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10년, 20년, 30년 같은 분야에서, 한결같이 환자를 보시는 선생님들은 과연 어떨까? 그분들도 지겨울 때가 있을 텐데…… 환자 보는 게 싫고 환자가 미울 때가 있을 텐데…… 어쩌면 저렇게 한결같이 진료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임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꾸준하게 정진할 수 있을까…… 나는 못 그럴 것 같으니 진작 될 성싶은 떡잎은 아닌 것 같고, 적절한 시점에 하산하는 게 나나 환자 모두를 위해 나은 게 아닐까? 앗, 너무 자조적으로 흐르는 것 같다…….


오늘 아침 회진 중 본관과 암센터 사이 800m 남짓한 긴 복도를 걷는데 - 이 복도는 회진을 가이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거리다. 뭔가 선생님과 자연스러운 주제, 가능하면 학문적인 주제를 갖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하기 때문에 - 오늘은 선생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다. “Compassion fatigue라는 말 들어봤어요?” 무슨 말인지 대충은 짐작이 되는데 무슨 일 있으신가?
“오늘 ○○○환자가 응급실로 올 거예요. 오면 신경외과로 연락해서 감마나이프 수술을 먼저 하게 해주세요. 갑자기 경기(seizure)를 해서 뇌 MRI를 찍었더니 종양이 있었대요. 아마 폐암이 뇌로 전이된 상태에서 발견된 것 같아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남자인데, 벌써 결혼을 해서 아기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한참 말씀이 없으시다. 그리곤 한마디 덧붙이신다. “참 너무한 것 같죠?”
선생님은 아주 서글서글한 외모로 환자들에게 인기가 많으시다. 환자에게 병의 경과와 앞으로의 예후 등에 대해 소상히, 그렇지만 환자가 부담스럽지 않게 설명하신다. 암환자 진료이니만큼 그렇게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어둡지 않게, 긍정적으로, 늘 다른 대안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은연중에 풍기시기 때문에 환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선생님도 어떤 상황이 되면, 조금은 지치시는지 얼굴 표정이 공허해진다.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다른 선생님께 여쭤본다. “선생님은 너무 안타까운 환자들, 말 안 듣는 환자들, 의사의 치료 의지를 꺾어버리는 환자들을 보고 속상해서 지칠 때가 있으신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탈출구를 찾으시나요?” 선생님은 의외로 단호하게 답을 주신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에 BMT(골수이식) 환자 볼 때는 정말 나도 너무 괴로워서 다리 쭉 펴고 자본 적이 없다니까요. 지금처럼 fellow들이 내 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 알아서 봐야 했죠. 별로 좋은 약도 없던 시절이라 혈액종양내과 의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일요일도 안 쉬고 아침저녁으로 회진돌고 환자보고 설명하고, 나쁜 환자 중환자실 가면 옆에서 지키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아졌어요. 일요일에는 절대 병원에 안 오려고 해요. 그때는 확실히 쉬어야죠.”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신다는 선생님은 종교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으신다고 했다. 종교적 심성이 약한 나는 그런 방법을 택하기에는 좀 더 수련이 필요하다.


예전 선생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런 마음은 다른 환자를 만나면 풀려요. 모든 환자들이 다 그런 게 아니니까요. 환자랑 문제를 토론하고 해결 방법을 찾고, 그리고 나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고마워하는 환자를 보면, 나도 힘이 나고 새로운 에너지를 찾게 되요. 결국 그런 문제의 해답은 환자와 함께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됩니다.”
Compassion fatigue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동정심 피로증’이라 번역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이해하게 될 때 자발적으로 도덕적 감정이 분출되지만, 그런 일이 반복됨에 따라 이러한 감정이 소모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상에 대한 공감의 능력과 열정이 조금씩 깎여나가고 약화되는 것을 지칭한다. 대형 재난을 당한 사람 등을 위하여 돈과 동정심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데 따른 심리적 탈진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동정심 피로증의 증상은 무기력해지고, 삶의 즐거움을 점점 못 느끼게 되며,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안감 및 부정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나 또한 의사가 되고 나서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익숙한 느낌인 것 같다. 힘들고 병약한 환자들을 보며, 나는 의사로서 뭔가를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고,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내 능력이 부족하여 문제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와중에 내 마음의 열정과 성의가 사그라져 버릴 때, 그래서 우리가 흔히 burn out 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바로 그런 증상인 것 같다. 한 명의 환자를 볼 때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내가 뭔가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느끼지만, 그런 환자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하게 되면 점점 무덤덤해지고 가슴아파하지 않게 되는 것이리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내가 burn out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주위 동료가 그런 느낌으로 의욕을 잃고 힘들어 할 때, 그런 소모적이고 허무한 감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긍정의 마인드를 어디서부터 다시 얻을 수 있을까?
Compassion fatigue는 의료직 종사자, 특히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에게 자주 생기는 증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환자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가족처럼 아끼고 돌본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늘 그런 식으로 진료하다간 정말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릴 것이다. 반면 자신의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너무 거리를 두면 환자와 너무 차갑고 딱딱한 관계만이 형성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간 적절한 관계유지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적당한 거리두기’일지 모르겠다. 좀 썰렁하게 느껴지겠지만 거리를 두고, 그러나 마음속에서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을 때 오래 가는 사람이 되겠지?
말은 쉽지만, 나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맞추지 못해 늘 괴로워하고 미안해한다. 때로는 너무 다가갔다가 ‘앗, 뜨거’ 하며 물러서고, 때로는 뒤돌아선 후에 ‘왜 한 발 더 다가가지 못했을까’ 하며 후회한다. 정말 좋은 의사가 되려면 몸과 마음 모두가 아주 튼튼해야만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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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수현은, 이화여대에서 자연과학의 기본인 물리학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의 기본인 사회학을 공부했다. 의료사회학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으나, 응용과학의 첨단인 의학을 ‘직접’ 공부하고 싶어서 연세의대에 편입하여 4년만에 ‘쾌속’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내과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다. 여전히 남편은 물론 딸 슬기에게도 별로 신경을 못 쓰는, 친정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고는 생활이 안 되는 30대 아줌마다.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배운 사회학과 의학을 접목해 보리라는 의지를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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