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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엄마’가 돌아왔다. 사회학도 출신의 아줌마 의사 이수현은, 지난 2004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본지에 ‘슬기엄마의 인턴일기’를, 지난 2005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슬기엄마의 주치의일기’를 각각 연재했었다. 4년간 계속됐던 연재를 중단한 지 1년 6개월 만에 슬기엄마가 다시 펜을 잡았다. ‘슬기엄마의 일기’ 시즌 3가 시작되는 셈이다. 지금은 내과 전문의이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가 된 그가 다시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첫 번째 글에 드러나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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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그러나 믿음이 아주 깊지도 않고 성당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며 내 생활 자체가 종교성이 강하지도 않다(하느님, 죄송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주말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자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난 사실 지난 8개월 동안 주말 미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12월에는 성탄 미사도 안 봤는데, 미사를 안 봤다고 해서 마음이 아주 괴롭거나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도 크게 심하지 않다(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성당에 안 가면 슬기와 엄마가 나를 아주 몹쓸 사람 취급하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가는 측면이 강하다(엄마, 죄송해요).


나는 그렇게 ‘나이롱’ 신자이지만, 그 나이롱 끈이라도 놓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은, 병원에서 지내다 보면 인간의 한계, 의사의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환자를 위해서 의사인 내가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하여 환자를 위해 손잡고 기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순간이 가끔씩 있기 때문이다.
기도문을 만들고 지향을 갖는 자유기도를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매우 어려운 일이 된 탓에, 요즘에는 묵주반지를 이용해 주의 기도나 성모송 같이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는 편이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회의에 참석해 있는 중에 딴 생각이 날 때, 불현듯 누군가를 위해, 그의 평안을 위해, 나약한 나를 위해 기도한다. 종교 유무를 불문하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 같다. 특히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루라도 착하게

지난 일요일 아침, 슬기와 함께 성당에 갔다. 이미 청소년이 되어버린 슬기는 엄마보다 친구가 좋은 나이가 되었는지, 친구랑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서자마자 저만치 앞서서 뛰어가 버린다. 8개월 동안 주말미사를 불참한 상태에서 고백성사를 보러 가는 길이라 슬기를 따라 뛰기보다는 부담스럽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성당을 향했다. 고백성사를 보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으로 죄를 정리한다. 어휴, 어차피 내 죄는 반복될 것이고 나는 쉽게 착해지지 않을 텐데 이거 꼭 봐야 하나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죄를 덜어야겠다는 면피주의적인 마음이 앞서서 불안한 마음을 꾹 참고 내 차례를 기다린다.


고백성사의 내용이나 이에 대한 신부님 보속 말씀은 비밀을 지키라 되어 있으니 지면으로 옮길 수는 없겠으나, 나를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신부님이 내 삶의 맥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상당히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시고 진단을 내려주시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사람 사는 게 비슷해서 그런 걸까? 나는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내 죄의 상황을 묘사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신부님께서 그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코멘트를 해 주셔서 유쾌하기까지 했다. 정확한 진단과 명쾌한 치료방법을 제시해 주는 명의를 만난 것처럼.
돌아서 나오는 마음속에는 ‘오늘 하루라도 착해지자’ 하는 다짐과, ‘남의 탓을 하고 구조와 제도의 탓을 하고 상황의 비합리성을 논하는 데 열중하느라 정작 나를 돌아보는 데에는 소홀했었구나’ 하는 반성의 마음이 절로 든다.

남을 위해 내놓을 것이 있다면

요즘은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 통합교육이나 PBL 교육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본과 1학년 1학기에 의대생을 고통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0학점짜리 해부학’과 같은 과목은 없어진 것 같다. 공포의 대상은 물론 카데바나 해부 실습 자체가 아니었다. 해부해 놓은 결과를 평가 받는 일, 기말에 보는 해부학 땡시,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체 장기 곳곳의 이름을 외는 데 급급했던 쪽지시험, 그리고 최대 학점 과목의 막강한 시험 후유증으로 형편없이 떨어진 나의 성적…, 공포의 대상은 그런 것들이었다.  


한 학기를 마쳐가던 무렵, 우리 동기들 몇 명이 우리도 해부학 실습을 마친 기념으로 사후 시신기증을 약속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나눠본 적이 있었다. 어차피 죽어 땅 속에 묻히면 며칠 만에 썩기 시작해 금세 흙으로 돌아갈 몸인데, 후배들을 위해 시신 기증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누군가가 내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가 그런 일에 선뜻 찬성의견을 내놓을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그런 제안을 들으니 망설여짐이 있었다.
겨드랑이 림프절 주위를 아틀라스처럼 예쁘게 해부를 해 놓아서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질 만큼 해부를 잘하는 동기도 있었지만, 느리고 둔한 손재주로 손바닥 해부를 담당했던 나로서는 차마 내 몸을 나와 같이 둔한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전에 의사 파업이 시작되는 바람에(그래, 그때는 2000년이었다) 해부학 수업은 정식 종강수업과 시신을 기증하신 분들을 위한 추도 행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고, 우리의 시신기증 논의도 흐지부지되고 말았었다. 나는 과연 내 몸을 내놓을 수 있을까?
마침 성당에서 조혈모세포 및 뇌사 시 장기 혹은 각막 기증을 신청하는 서류를 받고 있었다. 조혈모세포 기증을 위해서는 기증자의 나이가 만 40세 이전이라는 기준이 있어, 나는 이 기회마저도 곧 놓치겠다 싶어 팔을 걷어붙이고 채혈을 했다. 내친 김에 뇌사 시 각막을 비롯한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신청서도 작성하여 제출했다. 실제로 내가 조혈모세포 기증자가 될 확률이나 뇌사를 당하여 장기 기증을 할 확률은 사실 그리 높지 않다. 각막 이식은 자연사 후에도 가능한 일이니 잘하면 각막 이식은 실천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아침, 내 마음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작은 성의를 보였다는 만족감으로 성당을 나선다. 마음 한쪽에 나는 과연 얼마나 사회에 기여(contribution)하고 사는 존재인가 물음이 생긴다. 언제부터인가 철저하게 나만을 챙기고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의사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쉽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환자만 보면 큰 문제가 없는 존재이다 보니, 소통의 부재 공간에서 존재적 자각(insight) 없이 살기 쉬운 것 같다. 봄은 봄인데 눈이 펄펄 내리는 이 흉흉한 계절을, 다른 사람과 제대로 소통하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이 두 가지를 몸과 마음의 축으로 삼아 이겨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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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수현은, 이화여대에서 자연과학의 기본인 물리학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의 기본인 사회학을 공부했다. 의료사회학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으나, 응용과학의 첨단인 의학을 ‘직접’ 공부하고 싶어서 연세의대에 편입하여 4년만에 ‘쾌속’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내과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고, 삼성서울병원을 거쳐 지금은 세브란스병원 혈액종양내과 펠로우다. 여전히 남편은 물론 딸 슬기에게도 별로 신경을 못 쓰는, 친정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고는 생활이 안 되는 30대 아줌마다.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배운 사회학과 의학을 접목해 보리라는 의지를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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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엄마] 너무 오랜만에 성당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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