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에도 학회에 갔었는데, 뒤에 앉았더니 집중도 잘 안 되고 화면도 잘 보이지 않아서 제일 앞줄로 나가서 강의를 듣기로 했다. 앞에 앉으니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고,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근처에 계신 교수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저절로 훔쳐들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나야 종양학 분야에 입문한 지 2년째에 불과한 강사 신분. 여러 병원의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은 적은 꽤 있어도,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분들은 많지 않다. 때문에 교수님들도 내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으시고 자연스럽게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선생님, 제가 여차저차한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데요, 반응은 좋은데 이 약을 언제까지 쓰는 게 좋을까요? 이렇게 쓰면 보험에서 문제는 없을까요?”
“글쎄요, 저는 몇 년까지 써봤어요. ○○○연구에서 데이터가 있으니까 근거는 있는 셈이에요. 그런데 저도 너무 오래 쓰는 것 같아서 끊었더니 금방 재발하더라구요. 그런데 또 다시 썼더니 좋아졌어요. 근데 보험으로 쓰려면 심평원에 서류를 좀 많이 제출해야 할 거에요.”
“선생님, 이 약을 이러이러한 경우에 쓰는 게 보험이 안 되는 건가요? 전 얼마 전에 삭감 당했다고 통보받았어요. 환자는 치료가 잘 되고 있는 중인데, 삭감 당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환자는 비급여라도 쓰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불법진료가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소견서에 이러이러한 내용을 쓰면 통과시켜주는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는데 삭감 안 당했어요. 그럴 때 한 6개월 계속 소견서를 쓰면 통과되기도 해요”
“선생님은 이러이러한 환자 보신 적 있으세요? 제게 지금 이런 환자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저러저러한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보고 있는데, 별로 치료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환자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특별히 시도해 볼만한 약제조합이 없는데…”
“그럴 땐 현재 약제가 독성이 심해서 쓸 수 없는 것처럼 의무기록을 남기신 다음에 무슨무슨 약을 쓰면 삭감 안 되고 보험으로 쓸 수 있어요. 단 3주기 돌린 다음에는 CT를 찍어서 어찌어찌 평가를 꼭 하셔야 해요.”
선생님들은 학회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 쉼 없이 환자들 케이스를 서로에게 털어놓으며 의견을 나누고 계셨다. 서로 노하우를 알려주고 ‘꽁수’도 알려주며 의견 교환에 한창이시다. 나 같은 피라미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했던 선생님들, 그들의 유창한 강의만큼, 유수의 대학 병원에서 자기 분야의 전문가인 만큼, 환자 진료에도 거칠 것 없이 ‘척척’이신 줄 알았는데, 너무 솔직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으며 고민하고 서로에게 질문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아니, 고명하신 선생님들께서 이렇게 모르시는 게 많았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암환자를 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며, 교과서나 논문에서 제시하는 도식화된 지식, 표준적인 방식만으로는 환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병의 특징을 고려한 진료를 할 수 없다는 고전적인 명제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도 한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치료도 치료지만 심평원 심사 피해가기, 보험으로 청구하기, 임의비급여 처리하기 등 진료비와 관련된 문제가 주를 이루었고, 건강보험 적용을 가능하게 하도록 서류를 작성하는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이 대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소곤소곤 상의를 하시는 선생님들이 얼마 전 유방암에서 특정 표적치료제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수개월간 자료를 준비하고 근거를 만들어 심평원에 제출했던 파일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유방암 환자에서 이 약제를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지, 예상되는 환자 수와 비용은 얼마나 발생할 것인지 등등에 대해 외국의 문헌과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여 자료를 만드셨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요즘처럼 개인의 업적이 생존전략의 핵심을 차지하는 시대에, 내 업적에 도움 안 되고 잔뜩 준비했다가도 승인 안 되면 모든 노력이 무화되어 버릴 수 있는 건강보험공단 관련 서류작업을 하면서, 과학적이고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꼼꼼히 서류작업을 준비하고 끝내 보험 승인을 받아내신 걸 보니, 이분들이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녕 환자들은 모르겠지만….
발표를 위해 며칠 밤을 새워 준비하셨을 파일도 선뜻 메일로 보내주신다고 한다. 발표용 파일을 하나 만들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사소한 디자인을 하나 수정하기 위해서 마우스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클릭을 해야 했던가! 어느 페이지에 들어갔으면 싶은, 내 마음에 꼭 드는 그림 하나를 찾기 위해서 구글 이미지를 얼마나 뒤져야 했던가! 내용도 내용이지만, 표 만들고 그림 그리는 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 파일을 누군가가 내게 달라고 하면 솔직히 마음속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데…, ‘너는 고생 안 하고 공짜로 먹으려 하다니!’라는 속 좁은 마음이 들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서로서로 메일을 보내주고 자료를 공유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으셨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공부라는 게, 내가 환자를 본다는 게, 결국 나 혼자 힘만으로는 결코 잘 굴러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가시적인 성과가 아니어도,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않아도, 환자를 위해 의논하고 노력을 함께 하는 선생님들이 정말 멋지다는 느낌을 받게 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번 학회에서 좋은 걸 얻었다. 이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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