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가 만난 사람]
김동주(효장수요양병원 원장) 
제3회 한국의사가요대전 예선이 지난 3일부터 지역별로 치러지고 있다. 부천에서 열린 경기지역 예선에 참가한 9개 팀을 시작으로 대구에서 열린 경상지역 예선에는 12개 팀, 천안에서 열린 충청지역 예선에도 12개 팀이 참석해 의사 가요제의 무대를 달구고 있다.
특히 젊은 의사들이 많이 참여했던 부천에 비해 대구 지역에서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의사들이 참여해 모든 의사들이 함께 즐기는 의사들의 잔치라는 의미를 더했다.
그 중에서도 현재 참여 신청을 한 의사들은 물론 역대 참가자를 통틀어 가장 연장자였던 “까꾸로 서른일곱” 김동주 원장의 무대는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가 된 흥겨운 자리였다.
가요제에 참가한 이에게 ‘연주자’라니 어색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목소리보다 아코디언 연주였다.
아코디언 특유의 크고 흥겨운 연주에 청중들은 박수로 흥을 돋웠고, 연주하는 내내 김 원장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흥겨운 무대였지만 본선 진출이 불가능한 ‘감투상’에 머무른 김 원장은 “환자들이 즐거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모범적인’ 수상 소감으로 더 큰 박수를 받았다. 58년간 연주해 온 아코디언으로 환자들은 물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아코디언 의사’ 김동주 원장을 만났다.
김 원장이 운영하고 있는 요양병원 원장실, 작은 방에는 전자 오르간 한 대와 정체불명의 커다랗고 검은 하드케이스 하나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책상 앞에 놓인 TV 위에는 대구 예선에서 받은 ‘감투상’ 트로피가 단단히 붙어 있다(강력 테이프로 붙여 놓았는지 힘주어 밀어도 꼼짝하지 않을 정도).
“아, 예뻐서 올려놨지, 하하. 아코디언으로는 첨 받은 상이라 받고 나서 기분도 좋았고.”
이 말만 들으면 취미일 뿐인 것 같은데, 사실 김 원장은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송민영 악단(나중에 KBS 전속악단으로 일했다)과 함께 아코디언을 연주했던 ‘준프로’다.
김 원장이 아코디언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을 즐기신 아버지가 어디선가 낡은 아코디언 한 대를 갖고 들어온 것이 계기였다.
아버지의 연주를 귀동냥하고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낮에 혼자 아코디언을 ‘갖고 놀던’ 김 원장의 연주 실력은 점점 늘었고,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동주에게 아코디언을 넘겨주라”고 ‘요구(!)’했다고.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버티던’ 아버지는 화음까지 익숙하게 넣어 연주하는 아들의 실력에 두 말 않고 악기를 넘겼다. 그리고 더 많이 연습하라는 엄명도 내렸다.
알고 보니 지인들끼리 모이는 계모임 등에 ‘아코디언 신동’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하고 싶었던 것.
미8군 무대에 진출하다
“당시에는 노래나 악기를 잘하는 자녀가 있으면 그런 모임에 데리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돋우는 관습이 있었어요. 14살, 15살 됐을 때인데 당시 유행가를 다 모르니까 신청하는 곡을 다 할 수는 없었죠. 모르는 곡을 신청 받으면 밤에 열심히 연습해서 마스터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더 예뻐하셨죠. 얼마씩 주시는 용돈이 바구니가 넘칠 정도였으니까요.”
영화 관람료가 30원이던 시절, 그는 우체국에 저금해 놓은 ‘공연비’에서 200원, 300원씩 꺼내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니는 동기들의 운동화를 사주는가 하면 월사금이 밀려 울고 다니던 친구의 월사금을 해결해주기도 했단다.
아코디언 실력은 중3때 피난 와 있던 서울음대 학생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일취월장했다. 한 달에 2천원을 주고 배우기로 했는데 수업 시작 12일 만에 서울 수복이 되는 바람에 선생님이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고. 그런데 그 때 진도가 바이엘 87번이었다.
“음악에 소질이 있구나, 알았죠. 그리고는 고 2, 3학년 때는 방학이 되면 송민영 악단과 함께 공연을 했어요. 당시는 부산 영남극장 같은 데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같은 영화 한 편을 틀고 나서 막간 공연을 했거든요. 코미디언 서영춘, 이종철, 박옥초 씨가 만담을 하고 한복남(빈대떡 신사), 김정구(눈물젖은 두만강) 같은 가수들이 공연하는 무대였죠.”
프로의 세계를 맛본 그는 서울음대에 가겠다며 입학 원서를 부모님께 내밀었다.
아코디언을 내주던 아버지는 상대에 가라며 원서를 찢어버렸고,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며 의대 진학을 권했다. 상고를 다니고 있었지만 상대는 가기 싫었던 김 원장은 1957년 수도의대에 진학했다.
“소련이나 동독으로 음악공부를 하러 가고 싶었어요. 들어보니까 그 쪽 음악이 맞더라고요. 음악에는 이념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물 건너 간 거죠. 대신 비싼 의대 학비를 조달하느라 용산 미8군 홀에서 다시 송민영 악단과 공연을 했어요. 당시 일반 주자들은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연주하면 일당이 1,800원이었는데, 저는 의대 학비 낼 거라니까 2,700원을 주더라고요. 갔다 오면 공부가 밀려서 토, 일요일은 코피 흘려가며 공부했어요. 상고 출신이라 어학이 약했는데 독어, 일어,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따라가느라 힘들었죠.”
무사히 졸업하고 의원을 개설한 후에도 악단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돈 때문에 연주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단다.
대신 의료봉사활동을 면서 짬짬이 아코디언 연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아코디언은 언제든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닌다.
진료를 볼 때는 기운이 하나도 없던 사람들이 아코디언을 연주해주면 기운 차리는 것을 볼 때 연주하는 재미가 가장 크다는 김 원장, 하지만 앙코르라도 몇 번 받아서 한 시간 쯤 연주하고 나면 어깨가 묵직하단다.
“지금 여기 있는 게(진료실에 있던 하드케이스의 정체는 아코디언이었다) 96베이스인데 25kg이예요. 집에는 120베이스가 있는데 그건 32kg이거든. 96베이스는 한 시간 쯤, 120베이스는 20분 정도 하면 연주고 뭐고 하기 싫어지죠. 작년만 해도 서서 연주했는데 이젠 앉아서 해요, 하하.”
운영하는 요양병원에서도 명절 등 특별한 날이 되면 병동에서 연주하곤 하는데, 어쩌다 틀리기라도 하면 집에 와서 맹연습에 돌입한단다.
아무도 틀린 줄도 모르고 잘한다고 박수를 쳐도 그렇다. “나는 틀린 줄 아니까.”라는 이유다.
어쩐지 “하루 연습 안하면 내가, 이틀째는 오케스트라가, 사흘째는 청중이 안다”고 했던 파블로 카잘스가 떠오르는 대답이다.

아코디언 배울 분 모집!
“한마디로 광(狂)인 거지, 하하.”
악보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직접 채보하던 버릇은 그대로 남아서, 요즘도 신곡이 나오면 악보를 그린다.
책상 위에는 음악 사이트에서 내려 받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가사가 놓여 있다. 두 줄 정도 채보된 상태. 대구 예선에서 알게 된 이 노래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내가 1989년에 국제로터리 제369지역(경기, 인천) 총재를 했어요. 부천에서 꽤 오래 개업을 했거든요. 로터리 최연소 총재였죠, 49살 때니까. 그 때 인연으로 90년대 초에는 2년간 미국에서 봉사활동도 했어요. 그 때마다 이 아코디언이 큰 역할을 했죠. 어디 있든지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기쁘게 해줬으니까.”
의대 교수로 있는 아들을 비롯해 자식들은 아코디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요즘도 병원 지하에서 연습을 거르지 않지만, 모임에서 요청하면 들려주는 정도라고.
“그동안 건반도 치고 트럼펫도 불고 드럼도 쳤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이 아코디언이거든. 아이들도 안 하려고 하고, 요즘 같으면 환자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 중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쳐주고 싶어요.”
|





















